강남성모원안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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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막이식

각막이식 권위자
각막이식 각막이식 권위자

각막이식 권위자

김만수 원장은 1982년부터 지금까지 40년이상 끊임없는 연구와 수많은 경험으로, 인정받고 있고
MBC TV 느낌표 눈을떠요 각막이식 캠페인 이후로도 봉사 사업에도 꾸준히 참여하고 있습니다.
안과 전문의

각막이식 · 각막질환 · 백내장 · 시력교정

김만수 대표원장

· 現 강남성모원안과의원 대표원장
· 前 가톨릭대학교 서울성모병원 안과 과장, 주임교수, 안은행장
· 前 가톨릭대학교 은평성모병원 안과 명예교수
· 가톨릭대학교 의학과 안과학 박사
· 미국 미네소타대학교 안과 교환교수
· 대한안과학회 제 19대 이사장
· MBC TV 느낌표 <눈을 떠요> 출연
· 대한안과학회 각막기증활성화위원회 위원장
· 한국실명예방재단 총무이사
· 前 한국 콘택트렌즈학회 회장
· 前 한국 외안부학회 회장

안과의사로의 발돋움

인생의 첫 번째 잘한 선택으로 안과를 택하게 된 것이다. 안과 선택은 다른 임상과의 도움을
받지 않아도 자기 자신의 실력만 갖추고 있으면 훌륭한 의사가 된다는 김희수 원장님의
조언과 기독교 집안의 성경에서 장님 고침과 같은 기독교 사상이 고려 되었다고 본다.


안과 중에서 내가 전공한 각막 백내장은 1980년 이후에 세계적으로 새로운 기술이 도입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나는 전공인 각막 백내장의 수술 기술을 처음부터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우연하게도 나의 스승인
가톨릭 의대 강남(서울)성모병원의 김재호 교수님 새로운 기술을 배우는데 매우 적극적이었고
그 덕분에 나도 새로운 기술을 제대로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백내장 수술의 세계적 변화는 초음파 유화술, 후방인공백내장 삽입술, Nd-Yag laser 시술,
다초점 인공수정체 삽입술, 방사선 각막절개술, 엑시머레이저 굴절교정술이 도입 소개되었다.

1985

  • 우리나라 최초로 백내장 수술을 위한 초음파 유화술을 도입하고 임상 사용 전에 실험 함

  • 석사 논문 - 가토 각막에서 초음파 유화술 1, 2, 3분에따른 각막내피세포의 변화

1988

국내 최초 국산 인공수정체 개발(유니버설 광학에 참여)

1988

  • 국내 최초 미국 IOLab 에 인공수정체 모델 특허에 참여 ‘JHK model’

  • 박사학위 논문 - 가토안에 이식된 PMMA 인공수정체와 표면처리 된 PMMA 인공수정체가 주위 조직에 미치는 영향과 인공수정체 표면 세포의 형태학적 변화

1982

국내 최초 후방 인공수정체 삽입술 연수 시작

1987

국내 최초 후발성 백내장의 치료기구인 Nd-Yag laser 사용

1989

국내 최초의 다초점 인공수정체 미국 IOLab, 3M 사용

1991

  • 대학 병원 의사로는 처음으로 일본 동경 무사시노병원 기미야 시미즈교수에게 Exicmer laser 연수

  • 우리나라 대학에 최초로 들어온 엑시머 레이저 연수 받음

  • 미국 미네소타 대학의 백내장 인공수정체 세계 최고의 대가인 린드스트롬 교수밑에서 2년간 연수 받음

각막연구 및 굴절수술 등 업적

개개인마다 최적화 된 맞춤형 수술을 통해
안전성은 물론 만족도 높은 수술이 가능합니다.

각막이식수술

  • 1986

    국내 최초 각막이식 후 각막민감도 변화 연구

  • 1986

    국내 최초 각막이식 후 내피세포 변화 논문 발표

굴절수술(엑시머레이저)

  • 1991

    강남성모병원 : 엑시머 레이저 국내 대학병원 최초 도입구

  • 2001

    국내 최초 굴절수술(PRK) 장기 경과관찰 발표

콘택트렌즈

  • 1986

    국내 최초 콘택트렌즈 세척제 동물연구

  • 1987

    국내 최초 각막이식 대규모 연구, 국내 최초 원추각막 임상 논문발표

안과의사 김만수

안과는 다른 임상과 보다는 다른 과의 도움 없이 스스로의 실력으로 진단을 할 수 있다는 특징이 있는 과로 정말 많은 지식을 얻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광범위하고 넓고 큰 것을 택하지 않고 애초부터 아주 작은 것을 택했으니 더 집중할 수 있어서 좋았다. 작은 것을 통해서 큰 것을 볼 수 있게 하는 일이 정말 좋다. 어두운 곳에서 밝은 곳을 보게 하는 일도 좋다. 절망에서 희망을 갖게 하는 행위이다. 수술 결과가 바로 나타나는 일이 어렵다. 내가 잘 못한 일을 다른 안과 의사가 본다면 얼마나 원칙적으로 했는가를 알 수가 있는 솔직한 과이다. 몸과 마음도 항상 결과를 숨길 수 없듯이 깨끗해야 한다.

안과 의사가 흔히 착각하는 일은 의술을 통해서 환자를 보게 만드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 볼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 주는 것이다. 보게 하는 일은 세포가 한다. 오히려 고친답시고 실제로 보는 능력을 가진 세포를 망가트리고 있지 않나 되물어봐야 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보게 하는 일이 아니라 볼 수 있게 하는 일이다.

이식문화의 전파자

다행스럽게도 몇몇 봉사 단체와 연락이 잘 닿아서 시간이 나는대로 그들의 봉사 사업에  참여하곤 했다. 실명예방재단, 하트투하트재단, 라이언스 클럽, 가톨릭대학 봉사단체, 비젼케어, 캄보디아의 헤브론 병원 등에서 활동을 했다.

안질환은 성심성의껏 돌보면 장애를 면할 수 있는 상태가 많이 있다. 가장 관심을 갖고 봉사활동은 개안수술이다. 1년 4개월 동안 mbc tv 방송을 통해 각막이식을 통한 각막이식의 중요성을 부각시키는 일도 우연히 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에 부족한 이식문화의 저변화를 위한 노력으로 보람이 있었다. 여전히 우리나라 시골지역의 노인들이 조명이나, 돋보기 착용 실태, 시력정도, 눈 건강 상식 등을 알려 주고 싶다.

EPISODE

내가 일하던 시대에는 오늘날처럼 우리 사회가 조직화 되거나 비대화 되지 않았다.

내가 일하던 시대에는 오늘날처럼 우리 사회가 조직화 되거나 비대화 되지 않았다. 내가 일하던 백내장각막이식분야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잘 나가는 분야였지만, 전문가가 나와 나의교수 김재호 선생님뿐이었다. 의사 사회에서는 도제제도로 윗사람의 지시는 옳고 그름의 판단도 없이 무조건 지시에 따르는 시대였다. 유명하신 교수님 덕분에 밀려드는 환자로 눈코 뜰 수 없는 상황이 지속되었다. 낮에는 외래, 수술 환자의 조수는 물론 교수회의나 바쁜 일로, 밤에는 논문은 쓰는 일로 밤을 새는 날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사실 그만 두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의사는 그만 두면 중간에 보충이 어려워 그만 둘 수도 없고, 일을 하지 안하잖니 나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고, 휴가 몇 일로 해결될 일도 아니었다. 아무튼 이러한 일이 내가 전임강사 시작한 1985년부터 1990년 내내 지속되었고 그 강도는 점점 강해 졌다. 전쟁에 장수 나온다는 말이 있듯이 죽지 않고 나 나름대로 버팀은 내가 안과 의사 된지 5년 만에 전국에서 제일 알아주는 의사로 성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안과수련 훈련은, 훈련 중에서도 혹독한 훈련이었다.

그때 배운 지식으로 남들보다 조금 더 유명해졌지만, 그보다는 한 인간으로서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능력을 증명했음에 감사했다. 일이 완성됐을 때 업적은 시킨 사람에게 돌아가지만, 그 배움은 자신의 것이라는 사실에 감사한다. 대충하면 대충의 지식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 때 배운 지식과 환자에 대한 관심이 나의 발전과 행복의 원천이었다.

“대표적인 예로 일년에 7일 밖에 없던 여름 휴가에서 무주구천동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교수님께서 전화가 왔다 당신은 급한 일로 수술을 할 수 없으니 각막이식 환자가 있는 지금 수술을 해 주라는 것이다. 나는 교통도 좋지 못한 상황에서 다시 몇 시간을 들여서 다시 와서 수술을 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사람은 기회라는 것이 있는 것 같다. 내가 안과를 시작하는 시기에 세계적으로도 새로운 수술법이 정립되고 있었다.

내 분야인 백내장 수술의 경우 초음파수정체유화술이라는 새로운수술 방법이 도입되고 있었다. 그때 새로운 수술법을 익히지 못한 안과의사 는 백내장 수술법을 익히지 못하게 되었고, 그때 배운 수술법은 공교롭게도 40년이 지난 지금도 같은 방법이니 나는 그때 제대로 익힌 방법을 응용하여 40년 동안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굴절수술도 1990년에 처음 엑시머 레이저가 도입되어 각막을 절삭하여 수술을 한다. 이 방법 역시 국내최초로 집도한 후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세계의 변화 급속히 일어났고 변화에 적응을 하지 않는다면 정말로 도태되는 세상에 살고 있다. 기계의 약간의 변화보다도 개념이 변화하는 것이 너무 많다. 새로운 것에 두려움보다는 내 것으로 만드는 적응을 하는 것이 의학 분야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외국에 처음 나갈 때인 1989년에 김재호 교수와 함께 중국 학회에 갈 기회가 있었다. 그 당시 중국은 우리나라와 수교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중공 (중국공산당) 이라고 불렸고, 특수 여권을 가져야 들어갈 수 있었다. 중공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일본을 통해서 가는데 일본 학회에 있는 동안 중공에 들어갈 수 있는 특수 여권을 실수로 잃어버렸다. 중공에 갈 수 없는 실정이었다. 스승인 김재호 교수는 나한테 “베이징에서 보자”라고 하면서 냉정하게 말씀하셨다.

아마 내 능력을 테스트 하는 것이었다. 나는 외국에 갈 기회가 전혀없는 상태에서 어떻게 중공특수비자를 받을 수 있는지 잘 몰랐었다. 막막한 가운데, 주위 사람이 홍콩을 가면 한국 사람도 중공 특수비자를 받을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그길로 홍콩을 갔다. 홍콩에서 2일 만에 내 한달 치 봉급에 달하는 비용을 주고 중공특수 비자를 얻을 수 있었고 이미 베이징에 와 계신 김재호 교수님을 만날 수 있었다.

김재호 교수는 “오느라고 수고했어“ 말씀 하시면서
나를 선생님의 수제자로 받아 주셨다.
흙에 묻히면 썩어 없어질 것이 다른 이의 몸에 들어가면 새로운 생명으로 살아난다.

내 일 하는 건데 '좋은 일 한다'니 기분 좋기도 하고, 복이란 생각도 많이 들어요.
이젠 이 분위기를 이어나가서 사회적인 분위기는 만드는 것은 물론 국가에서도 나서야겠죠.

시력회복으로 개인과 사회를 풍요롭고 따뜻하게 만들자.